서울에서 가을 산책을 할 때 사람 많은 궁궐이나 공원 대신 조금 조용한 길을 찾는다면 종로구 행촌동도 괜찮아요. 인왕산 아래쪽에 자리한 동네라 경사가 조금 있지만, 한양도성 성벽과 오래된 주택가가 바로 맞닿아 있어 서울 한복판에서도 꽤 독특한 풍경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행촌동에는 동네 이름의 유래와도 관련 있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남아 있어요. 주변에는 딜쿠샤, 홍난파 가옥, 월암근린공원 같은 근현대 역사 장소도 가까이 모여 있습니다. 서울시가 소개하는 한양도성 인왕산 구간 역시 돈의문 터에서 출발해 경교장과 월암공원, 홍난파 가옥을 거쳐 인왕산 쪽으로 올라가는 흐름으로 이어집니다.
가을에 걷는다면 서대문역→경교장→월암근린공원→홍난파 가옥→딜쿠샤와 은행나무→한양도성 성곽길 정도로 잡으면 행촌동의 분위기를 비교적 편하게 볼 수 있어요. 인왕산 정상까지 올라가지 않는다면 가벼운 반나절 산책으로도 충분합니다.
서대문역에서 월암근린공원까지, 성곽이 보이기 시작하는 길
출발은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으로 잡는 게 편합니다. 현재 딜쿠샤 공식 관람 안내에서도 서대문역에서 서울교육청과 홍난파 가옥을 지나 행촌동 안쪽으로 들어가는 접근 경로를 안내하고 있어요.
역에서 나와 경교장 쪽을 지나 서울교육청 방향으로 올라가면 서서히 평지에서 언덕길로 바뀝니다. 관광객을 위해 따로 만든 산책로보다는 원래 있던 동네 길을 걷는 느낌이 강해요.
조금 더 올라가면 월암근린공원이 나옵니다. 이곳은 행촌성곽마을로 들어가는 초입 역할을 하는 곳으로 소개되고 있으며, 공원 주변에서 한양도성 성벽도 가까이 볼 수 있습니다. 서울시 자료에서도 행촌성곽마을을 한양도성 서쪽 인왕산 아래 자리한 행촌동·교남동 일대로 설명하고 있어요.
가을에는 나무가 많은 대형 공원처럼 단풍이 한꺼번에 펼쳐지는 곳은 아니지만, 돌로 쌓은 성곽과 나무가 한 화면에 들어오는 풍경이 꽤 좋습니다. 날씨가 맑은 날에는 성곽을 따라 천천히 오르는 것만으로도 산책 분위기가 살아나요.
홍난파 가옥까지 이어지는 오래된 골목
월암근린공원에서 조금만 이동하면 홍파동 홍난파 가옥을 만납니다. 1930년대에 지어진 서양식 주택으로 현재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등록돼 있어요. 소재지는 종로구 송월1길 38이며, 지상 1층과 지하 1층으로 이루어진 건물입니다.
붉은 벽돌과 주변의 오래된 골목이 어우러져 있어서 이 구간부터 행촌동 산책의 분위기가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성곽만 보고 걷는 길과 달리 근대 건축과 현재의 주택가가 한 공간에 섞여 있죠.
이 동네는 실제 주민들이 생활하는 곳이라 골목 안쪽까지 구경할 때는 조용히 걷는 편이 좋습니다. 행촌동이 재미있는 건 관광지가 한 줄로 늘어서 있어서가 아니라, 평범한 주택가를 걷다가 갑자기 오래된 가옥이 나오고 다시 성곽이 나타나는 식으로 풍경이 계속 바뀐다는 점이에요.
행촌동 가을의 중심, 딜쿠샤와 권율장군 집터 은행나무
가을에 행촌동을 찾는다면 가장 눈여겨볼 곳은 딜쿠샤 주변입니다. 딜쿠샤는 앨버트 W. 테일러와 메리 테일러 부부가 살았던 붉은 벽돌집이에요. 앨버트 테일러는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와 일제의 탄압 상황을 외국에 알린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현재 건물은 복원돼 서울역사박물관이 운영하는 전시공간으로 사용되고 있어요.
그리고 바로 이 주변에 행촌동의 상징 같은 거대한 은행나무가 있습니다. 권율 장군의 집터에 있던 나무로 전해지는데, 서울시 자료에서는 수령을 약 460년에서 500년 정도로 소개하고 있어 정확한 연령을 한 숫자로 단정하기보다는 수백 년 된 고목으로 보는 편이 안전합니다.
행촌동이라는 지명도 이 은행나무와 관련이 있습니다. ‘행(杏)’ 자가 들어간 이름답게 과거 이 주변이 은행나무가 있는 마을, 은행나뭇골 등으로 불렸다는 기록이 전해져요.
가을에는 이 나무가 노랗게 물들면서 붉은 벽돌로 지은 딜쿠샤와 대비되는 풍경을 만듭니다. 넓은 은행나무길이 길게 이어지는 장소는 아니에요. 대신 오래된 거목 한 그루가 동네 풍경의 중심에 서 있다는 점이 행촌동만의 특징입니다.
딜쿠샤 내부도 함께 보고 싶다면 현재 관람시간은 화~일요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며 입장 마감은 오후 5시 30분입니다. 매주 월요일과 1월 1일은 휴관하고 관람료는 무료입니다. 자유 관람은 별도 예약 없이 가능하고, 전시 해설은 별도로 운영됩니다. 방문 날짜에는 운영 정보를 한 번 더 확인하는 게 좋아요.
은행나무를 지나 한양도성 성곽길로
딜쿠샤와 은행나무를 보고 나면 그대로 인왕산 방향으로 조금 더 올라가보세요. 행촌동 주택가와 거의 붙어 있던 한양도성이 점점 길게 이어지기 시작합니다.
이 일대는 한양도성 공식 순성길 가운데 인왕산 구간에 해당합니다. 공식 전체 코스는 돈의문 터에서 인왕산을 넘어 윤동주 시인의 언덕과 창의문까지 약 4km이며, 예상 소요시간은 약 2시간 30분입니다. 공식 안내에서도 난도가 높은 구간으로 분류하고 있어요.
행촌동 가을 산책이 목적이라면 굳이 정상까지 갈 필요는 없습니다. 은행나무에서 성곽을 따라 인왕산 순성길 초입 정도까지만 올라갔다가 내려와도 충분해요.
성곽 바로 옆으로 일반 주택이 붙어 있는 모습도 이 구간의 특징입니다. 과거 서울시의 행촌성곽마을 기록에서도 주민들의 집과 텃밭이 성벽 가까이에 자리한 모습이 소개됐어요.
가을에는 회색빛 성벽 위로 노란색과 붉은색 나뭇잎이 겹쳐 보입니다. 단풍숲 한가운데를 걷는 느낌보다는 옛 서울의 성곽과 현재의 동네가 함께 보이는 가을 풍경에 가깝죠.
가벼운 산책과 인왕산 등산은 따로 생각하는 게 좋아요
행촌동 산책을 검색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인왕산 정상까지 이어지는 코스가 많이 나오는데요. 두 코스는 난도가 꽤 다릅니다.
가볍게 걸으려면 서대문역→경교장→월암근린공원→홍난파 가옥→딜쿠샤·은행나무→성곽길 일부 정도에서 마무리하는 게 좋아요. 카페나 내부 관람을 곁들이면서 천천히 돌아보기에도 적당합니다.
반대로 걷는 걸 좋아한다면 여기서 인왕산 순성안내쉼터를 지나 범바위와 정상, 윤동주 시인의 언덕까지 이어가도 됩니다. 다만 인왕산 공식 구간은 바위가 많은 산길이고, 정상 방향으로 들어가면 단순한 동네 산책보다는 등산에 가까워집니다. 서울 한양도성 공식 안내에서도 인왕산 진입 뒤에는 화장실이 없으니 미리 이용할 것을 안내하고 있어요.
행촌동은 유명 단풍 명소처럼 나무가 빽빽한 곳은 아닙니다. 대신 오래된 은행나무 한 그루를 중심으로 붉은 벽돌집과 좁은 골목, 한양도성 성벽까지 이어지는 풍경이 있어요. 특히 늦가을 은행나무가 노랗게 변하는 시기에 걷는다면 다른 서울 산책코스에서는 쉽게 보기 어려운 분위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몰리는 단풍길보다 조용한 서울 골목과 성곽을 함께 걷고 싶은 날, 행촌동을 한 번 걸어볼 만해요. 인왕산 정상까지 욕심내지 않아도 은행나무와 딜쿠샤, 성곽길만 연결하면 행촌동의 가을은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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